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5
주제문장/ 예배때 우리가 공적으로 죄를 고백할 때 용서의 말씀을 선포해 주신다.
설교개요/ 예배에는 하나님의 용서가 있다. 예배의 두 번째 파트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예배 인도자가 ‘십계명’(↓)을 읽고, 회중이 언약의 그 열 가지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기도’(↑)를 하면, 목사는 말씀으로 ‘사죄선언’(↓)을 한다. 용서의 말씀을 들은 회중은 하나님께 ‘감사찬송’(↑)을 올려 드린다. 이렇게 예배에는 죄고백과 사죄선언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공적으로 용서받았다는 것을 확인하며 확신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 요 20:19-23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 약 5:13-18 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
공예배때 죄고백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만큼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종교가 있을까요? 교회에서 죄라는 말이 빠지면 너무나 이상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죄라는 말, 죄인이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교회 오기 싫어합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내가 왜 죄인인데?’라는 질문을 해 댑니다. 자신이 죄가 없다고 뻔뻔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죄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도 예의가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죄를 너무 쉽게 말합니다. 예배에서도 죄라는 단어는 빠지지 않습니다. 예배 때 언제 죄라는 말이 등장하고, 회개하자는 말이 등장합니까? 곳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배순서에 아예 ‘죄고백’이라는 순서가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공예배 때 회중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죄에 대한 고백은 공예배 전에 개인적으로 미리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교회역사를 보면 교회에서 공적으로 죄를 고백하던 것이 이내 사제에게 사적으로 고해하는 것으로 바뀝니다. 소위 말하는 ‘고해성사’가 그것입니다. 거의 1천년 동안 교회는 공예배 때 죄에 대한 고백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이 죄를 지었을 때는 개인적으로 사제에게 가서 고해를 하면 되었습니다. 11세기에 개인적인 죄에 대한 고백문이 예배 앞부분에 추가되기는 했지만 예배하는 신자들은 사제에게 개인적으로 고해했지 예배 때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왜 예배 때 죄를 고백하는 순서를 가집니까? 한국교회에서는 예배인도자가 회중을 향해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자고 요청하는 것을 이상하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설교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면서 회개하자고 하면서 통성기도를 하는 전통이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 교회는 설교 후가 아니라 설교 전에 예배의 두 번째 파트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십니다’라는 파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파트 속에 회중이 각자 죄를 고백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이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습니까? 각자 조용히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식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들에서는 공예배시에도 자신들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도록 요구하는 경우조차 있습니다. 소그룹으로 성경 공부하거나 기도회를 가지는 시간이 아니라 공예배 시간에 개인적인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종교개혁은 죄고백의 중요성을 깨달은 데서 출발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도 실은 죄고백 그리고 용서의 문제와 깊이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죄인인 내가 어떻게 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평생 했습니다. 병적일 정도였습니다. 그는 의로우시기에 죄인들을 벌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두려워하고 미워하기까지 했다고 털어 놓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복음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성경말씀을 통해 깨닫고는 양심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후 그는 중세 로마교회의 면벌부를 포함한 고해성사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면벌부를 사면 죄에 대한 형벌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미신에 불과하다고 공격했습니다.
우선 우리가 용어문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중세교회가 죄를 씻을 수 있다고 하면서 판매한 것을 ‘면죄부’라고 불러 왔습니다. 중세교회가 판 것은 면죄부가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면벌부’입니다. 신자가 죄에 대해 마음으로 통회하고, 입으로 자백하고, 행위로 보속을 하면 사제는 죄가 씻어졌다고 선포합니다. 소위 말하는 ‘방면’(放免)입니다. 사제가 용서의 선언을 하지만 그 죄를 씻어주시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죄를 씻어주셔도 그 죄에 대한 형벌은 남아 있습니다. 그 형벌로 인해 연옥에서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죄는 씻어졌지만 형벌은 치러야 하기에 그 형벌을 줄여주거나 없애준다고 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면벌부입니다. 그러므로 면죄부라고 부르기보다는 면벌부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틴 루터〉라는 영화를 보면 이것과 관련된 아주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테첼이라는 신부가 자기 교구를 넘어서 마틴 루터가 섬기고 있던 비텐베르크에까지 와서 면벌부를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아픈 딸을 둔 한 어머니가 면벌부를 삽니다. 테첼이 자기 손을 횃불로 지지면서 면벌부를 사지 않으면 지옥에서 이렇게 불 심판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는 겁이 나서 돈을 주고 면벌부를 산 것입니다. 그녀가 아픈 딸을 데리고서는 마틴 루터에게 와서 면벌부를 샀다고 자랑합니다. 그러자 마틴 루터가 말합니다. ‘아픈 딸이 있지 않습니까? 돈을 아껴야지요’라고 말합니다. 돈을 아껴서 딸 병 간호에 써야 하는데 왜 쓸데없이 면벌부를 샀느냐고 책망한 것입니다.
중세교회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적으로 사제에게 고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용서가 보상행위를 통해서 온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용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전적인 은혜로 온다는 것을 부인한 것입니다. 은혜를 행위로 대체한 것입니다. 한동안 크게 인기를 끌었던 책이 일본 사람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이라는 책이었는데요. 중세교회는 십자군에 나가면 본인 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연옥에서 받아야 할 형벌을 말끔히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개혁한 교회는 죄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었지만 죄를 다루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그 유명한 95개조항의 대자보를 비텐베르크 성문교회의 문에 붙였습니다. 95개 조항 중에 첫 번째 조항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첫 번째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명하실 때에 우리의 전 생애가 회개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개혁한 교회가 죄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룬 것이 아닙니다. 개혁한 교회는 죄 문제를 훨씬 더 근본적으로 다루었습니다. 개혁한 교회는 죄 문제를 사적인 고백에 국한시키지 않고 전 삶의 문제로 보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면서 처리해야 할 문제로 보았습니다.
교회는 사죄를 공적으로 선언할 권리가 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신자는 자신들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어떻게 고백해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은밀하게 지은 죄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고백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관계의 문제 같은 경우에는 형제나 친구나 부모에게 고백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교회 앞에 고백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 죄를 사하는 권세를 맡기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그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에 소위 말하는 ‘열쇠권’을 주셨습니다. 교회가 죄를 사하면 하나님께서도 사하시고, 교회가 죄를 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죄를 사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 말입니다.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두 장 뒤인 마태복음 18장으로 가보면 이 매고 푼다는 것이 죄인의 죄를 교회가 용서해주고, 용서해주지 않을 권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교회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우리가 같이 읽었던 요한복음 20장 21절부터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사도행전으로 가 보면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에 교회가 세워지는데 복음이 이방세계에 전해지면서 이방인들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회개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기원후 1세기 말의 교회 문헌들을 보면 교회에서 죄를 고백하라는 문구가 분명하게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교회에서 하는 이런 죄고백이 사제에게 개인적으로 고해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죄고백과 관련해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구절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같이 읽었던 야고보서 5장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이 말씀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간단하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이 있으면 교회의 장로를 청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장로는 그 병든 사람에게 가서 기름을 바르고는 기도합니다. 믿음의 기도가 그 병든 사람을 일으킬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병이 혹시 죄로 인해 온 것이라면 그 죄를 사하심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 뒤에 바로 서로 죄를 고하고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일반적인 권면을 합니다. 복잡한 논의는 생략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믿는 이들끼리 서로 죄를 고하고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배를 주관하고 있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죄를 고하고 기도를 청하는 것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신자들이 서로 죄를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용서의 말씀이 교회를 통해 선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죄고백은 신중하게 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죄고백이 야기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중세교회처럼 신자가 사제에게 가서 사적으로 죄를 고백할 때는 문제가 안됩니다. 사제가 모든 비밀에 대해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이 불문가지입니다. 그것을 ‘고백의 봉인’(The Seal of Confession)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로마교회의 사제는 입을 다무는데, 우리 개신교회는 입을 함부로 놀립니다. 한 사람에게 알려지면 모두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이 일상적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은밀하게 말한 것이 설교를 통해서 공개적으로 말되는 경우도 있으니 얼마나 상처가 크고 분노가 일어나겠습니까? 사제는 교인들이 고백한 죄를 결코 발설해서는 안됩니다. 심지어 법정에서도 고해한 죄에 대하여 발설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있습니다. 무덤까지 그 고백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공적으로 죄를 고백할 때는 문제가 더 심각해집니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어떻게 됩니까? 교인들이 들어도 상관없습니까? 죄고백이니까 되도록이면 다른 교인들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까?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해야 한다면 죄를 온전하게 고백할 수 있는 신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북한에서 하는 것처럼 자아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속 은밀한 곳에 있는 죄를 고백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한다면 신자의 양심이 짓눌림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예배 안에서 회중에 속해서 조용히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합니다.
여전히 문제가 남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용히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는 것이라면 사적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는 십계명을 낭독한 후에 기도하기에 막연한 기도를 하지는 않습니다. 계명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고백의 기도는 신중하게 드려져야 하고, 공적인 방식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이때 도움이 되는 것이 죄고백의 기도문입니다. 개혁교회 예식서에 보면 다양한 기도문이 있는데 ‘기독교의 모든 필요를 구하는 기도문’에 보면 첫 번째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죄고백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 들어 보십시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올 자격이 없는 자들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고소하고, 우리의 죄가 우리를 향해서 소리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의 명령을 어기는 모든 죄들을 처벌하시는 의로움 심판자가 아니십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주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셀 수도 없는 수많은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특별히 감사하옵는 것은 주의 진리의 빛과 거룩한 복음의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주의 은총을 저버렸고, 주님으로부터 떠났고, 우리 자신의 욕망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존경할 만큼 존경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해 심각한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심판에 붙이신다면 우리는 저주와 영원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보옵소서. 주의 눈을 우리의 죄로부터 감아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주의 진노를 제거하옵소서.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날마다 죽여갈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강력하게 역사하옵소서.”이런 기도문을 같이 낭독하면 얼마나 힘있는 회개기도가 되겠습니까?
‘사죄선언’(↓)은 성경말씀으로 하는 것이 좋다
죄고백을 하고 나면 예배 인도자가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사죄선언’(↓)입니다. 여기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회중이 진정으로 회개했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렇다면 용서선언에 조건을 달아야 하지는 않을까요? 종교개혁 직후에 그렇게 했습니다. 진실로 회개한 신자들에게는 그들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는 신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여전히 즐기고 그것에 대해 자신을 책망하지 않고 그 죄들을 변명하면서 하나님의 엄하심을 비난하는 자들에게는, 그리고 죄에 대해 경고를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획득된 용서의 은사를 경멸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까지는 그들의 죄가 여전히 있고 천국에서 매여있음을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선언합니다.”
용서의 선언을 조건적으로 하면 죄용서의 문제를 개인적인 확신에 맡기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건이 담긴 사죄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셨다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7장 24절, 25절 말씀을 주로 사용합니다. 다른 말씀들도 많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 말씀도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사도행전 10장 43절 말씀도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하였느니라.”요한일서 2장 1절과 2절도 사죄를 선언하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죄를 고백하고 나면 ‘사죄선언’이 따라옵니다. 사죄선언이 있고 나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용서받음에 대해 ‘감사찬양’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죄고백(↑) – 사죄선언(↓) - 감사찬송(↑)이 따라 옵니다. 이 모든 순서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순서를 이끄는 것이 ‘십계명낭독’(↓)입니다. 죄고백과 사죄선언의 순서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낭독하므로 용서의 파트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 칼빈은 사죄선언 후에 십계명을 진술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았습니다. 예배 때 하나님께 죄고백을 하는 신자들은 처음으로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들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먼저 내세운 것이 아니라 용서의 말씀을 받은 후에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와 헌신을 표명하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계명이 죄고백 전과 후를 왔다 갔다 할 수 있음을 봅니다. 십계명은 우리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큰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줍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그 모든 계명들을 온전히 성취할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십계명을 감사의 법칙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사라진 죄고백과 용서의 말씀을 회복해야 하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개혁한 교회는 신자가 목사에게 사적으로 고해하는 것을 성례에서 배제시켰습니다. 고해성사를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죄의 문제를 가볍게 다룬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자들끼리 서로 죄를 고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예배에서 신자들의 죄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주일이 되어 신자들이 하나님의 회중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예배 인도자는 교인들에게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리고는 다같이 죄고백을 한 후에 용서의 말씀을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주시는 시간에 사죄의 말씀을 공적으로 선포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개혁한 교회가 이 죄고백과 사죄선언의 순서를 예배 순서에 포함시켰다가 이내 그 순서를 없애 버립니다. 정말 반짝이다 싶을 정도만 이 순서를 가졌습니다. 참으로 이상할 정도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종교개혁과 더불어 일어난 르네상스, 그리고 이후의 계몽주의 영향 때문일까요? 개인의 자유를 무한히 강조하던 분위기 말입니다. 하나님과 개인의 양심 사이에 어느 누구도 개입할 수 없다는 생각 말입니다. 어떤 사람도, 심지어 교회도 개인의 양심에 개입할 수 없다는 생각 말입니다. 죄고백도 죄고백이지만 사죄선언이라는 표현 자체를 거부하는 분위기도 컸습니다. 목사가 사죄를 선언하는 것은 중세시대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냐는 혐의입니다. 그것은 성직주의를 다시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내 예배순서에서 죄고백과 사죄선언이 사라지고 다시금 죄의 문제는 개인이 알아서 처리해야 할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현대교회까지 죽 이어져 왔습니다. 죄고백은 철저하게 사적이고 내밀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고백은 자기 양심과 하나님 사이의 내밀하고 사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회중의 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신을 갈고 닦아서 자신의 죄와 욕망을 씻어보고자 하는 수도자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불교인들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가족을 주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에게 고백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개혁한 교회는 죄고백이 사적인 감정에 그치지 않도록 예배를 통해 공적으로 죄고백과 용서선언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예배 때 죄고백과 사죄선언이 있으므로 우리는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공예배에 용서의 파트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공적으로 회중들의 죄를 고백받으시고, 하나님의 총회를 향해 용서의 말씀을 선포해 주십니다. 용서는 신자가 하는 회개의 진실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목사의 사죄선언을 통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긍휼과 자비, 그 분의 약속으로 인해 보장됩니다. 예배 인도자는 자신의 권위로 사죄를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인도자는 회개한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분명한 진술이 담긴 말씀을 낭독합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을 통해 이 사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합니다.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주관적인 감정에만 맡겨두지 않고 매 주일 예배시에 죄를 고백하고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공적으로 듣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확신과 위로를 가져다 주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속적으로 갱신하고 있으며, 우리의 신분을 새롭게 확인하고 회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날마다 용서받고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게 하시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된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늘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지은 죄를 고백할 수 있게 하옵소서. 이웃에게 지은 죄를 용서 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고백했다고 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것을 주관적인 감정으로만 확인받으려고 하면 우리는 끝없이 양심의 혼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회개해야 용서받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고 자신에게 속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죄고백과 용서의 문제를 사적인 감정과 확신에 매어 놓지 않도록 공적으로 끌어올려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것이 바로 직분이요 예배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아무리 회개해도 회개할 것이 남아 있는 자들이며, 오직 우리 바깥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에게는 용서와 의와 평강이 주어짐을 압니다. 예배 때 죄고백과 사죄선언이 있음으로 우리는 날마다 용서받고 있음을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으니 감사 드립니다. 죄고백과 용서의 말씀이 우리에게서 끊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용서가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말씀 묵상하고 나누기
1. 공예배때 죄를 고백하는 순서가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2. 중세교회의 고해성사의 핵심이 무엇이며, 죄고백의 성경적인 근거를 말해 봅시다.
3. 죄고백 전에 십계명을 낭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4. 예배때 어떻게 죄고백을 하며, 죄고백이 예배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5. 사죄선언은 어떤 방식이 좋은지, 사죄선언의 문구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말해 봅시다.
6. 칼뱅 선생아 십계명선포를 사죄선언 후에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7. 공예배에서 ‘하나님이 용서하십니다’라는 파트가 있는 것의 중요성을 말해 봅시다.
어린이를 위한 질문
1. 죄 고백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만 해야 한다, 맞습니까?
2. 교회가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 맞습니까?
3. 예배 때 ‘죄고백’과 ( )이 있으므로 우리는 (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