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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을 통해 정하신 합당한 예배 1


설교본문: 출 35:3(참고. 출 35:1-3; 민 15:32-36)

설교제목: 안식일과 불

성경봉독: 출 35:1-3; 민 15:32-36

요절: 출 35: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출 35:3)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1)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2)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출 35:1-3)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32)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왔으나(33)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35)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36)”(민 15:32-36)



<서론>

이 말씀은 안식일에 관한 규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죽이라고 하십니다. 그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는 이스라엘의 각 처소에서 불을 피우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준수해야 할까요?

교회사 속에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두 가지 잘못된 견해가 존속해왔습니다. 그중 하나는 율법주의입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을 오늘날에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킬 것입니다. 유대교 신자들과 안식교가 그러합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한편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반율법주의 또는 율법 폐기론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을 성취하시고, 우리에게 안식을 주셨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 율법은 신약시대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에 불을 켜지 말라는 이 말씀을 오늘날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구약의 율법을 성경에서 도려내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저열하게 취급하여 쓰레기통에 던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양쪽 주장을 모두 배격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모두 잘못된 것이라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적용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주일에 가스레인지의 불을 켜지 않습니까? 전깃불은 어떨까요? 이것은 불입니까, 아닙니까? 민 15:32-36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나무하는 자를 돌로 쳐 죽이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잘못된 견해를 정죄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바르게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제가 이 본문에 근거하여 여러분에게 전할 설교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주제: “안식일은 불의 날입니다.”

저는 다음의 순서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겠습니다.


대지: 

1. 안식일에는 각 개인의 처소에 불을 켜지 말아야 합니다.

2. 안식일에는 여호와의 불만 켜져 있어야 합니다.


1. 안식일에는 각 개인의 처소에 불을 켜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 율법을 대할 때, 그것이 문맥(context)과 무관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고전 14:33, 40). 이 말을 했다 저 말을 했다, 정신없이 오락가락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율법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며, 때로는 죄가 나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그분의 말씀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또 하나의 편견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편견입니다. 율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문자주의(literalism)].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십니다(신 20:16-18). 그러나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에 살던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들을 살려줍니다(수 6:22-25). 여호수아가 이들을 살려준 것이 잘못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족속을 모두 죽이라는 하나님의 이 명령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출 21:23-25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23)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24)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25)”(출 21:23-25)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 줄 것이며(26) 그 남종의 이나 여종의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놓아줄지니라(27)”(출 21:26-27)


종의 한쪽 눈이라도 상하게 하면, 그 대신 그 종을 해방시켜 자유인이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종의 이빨 하나를 상하게 하더라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이 원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심지어 자신의 노예까지도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지킬 수 없는 명령입니다. 성경 본문이 율법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적용하지 못하게 문맥을 통해 자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본문에 담아두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안식일 규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죽이라고 하십니다(2절). 이 명령은 출애굽기 31장에도 나옵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14)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15)”(출 31:14-15)


이런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안식일 규정을 어긴 사람들을 모두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조차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사람들을 꾸중했지만, 죽이지는 않았습니다(출 16:25-29).

이뿐 아닙니다. 느헤미야 13장을 보면, 안식일에 장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느 13:15-21). 당시 총독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장사하는 사람들을 엄히 꾸짖었습니다. 다시는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느 13:15).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편견을 버리십시오. 


첫째, 율법은 앞뒤 문맥과 무관하게 어려운 내용이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둘째, 율법은 마치 기계적으로, 그러니까 예외 없이 문자 그대로 지키도록 주신 것이라는 생각도 잘못입니다.


이 두 가지 편견을 버리고 나면, 이제 이 본문 말씀이 우리 앞에 열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죽이라고 하시면서, 단 한 가지 실례만을 언급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절)


이 문맥에서 안식일에 죽임을 당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안식일에 자기 처소에서 불을 피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 실례를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32)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왔으나(33)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35)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36)”(민 15:32-36)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나무하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나무를 모으다”입니다. 즉, 나무토막이나 나뭇가지를 모으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돌로 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를 돌로 쳐 죽입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이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이익을 위해 안식일에 장사하기 위해 짐을 옮기는 자들을 죽이지 않고 꾸짖기만 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를 돌로 쳐 죽이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큰 죄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안식일에 나무하는 자에게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가 왜 나무토막을 모으려고 했을까요? 팔려고요? 조각하려고요? 가구를 만들려고요? 목공예를 하려고요? 윷놀이를 하려고요? 거기는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것이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무를 모으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불을 피우기 위해서입니다.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2)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출 35:2-3)


이 말씀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웬만하면 죽이지 않지만, 이 말씀을 어길 때는 죽였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에 불을 피우는 것이 다른 그 어떤 죄보다 더 큰 죄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가는 것보다 불을 피우는 것이 더 심각한 죄입니다. 안식일에 짐을 옮기는 것보다, 자기 이익을 남기기 위해 장사하는 것보다 불을 피우는 것이 더 큰 죄입니다.

왜 그럴까요? 안식일에 자기 개인 처소에서 불을 피우는 것이 왜 그렇게 죽임을 당할 정도의 큰 범죄일까요?


2. 안식일에는 여호와의 불만 켜져 있어야 합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큰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는 큰 세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단락은 1~18장인데, 애굽에서 시내 산으로 가는 내용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구원입니다. 둘째 단락은 19-24장인데,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서로 언약을 체결하는 내용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교회입니다. 셋째 단락은 25-40장인데, 성막 건축 명령과 시행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배입니다.1) 그러니 출애굽기 전체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교회를 이루어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출애굽은 목표 지점이 아닙니다. 출발점입니다. 출애굽기의 목표 지점은 성막 건축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 예배를 통해 교제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라고 열 번도 넘게 반복하여 말합니다(참고. 출 3:12, 18; 4:23; 5:1, 3, 8, 17; 8:1, 8, 20, 25-29; 9:1, 13; 10:3, 7-11, 24-26; 12:31; 13:3-6).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의 세 번째 단락 가운데 위치합니다. 즉, 안식일에 이스라엘 모든 처소에 불을 피우면 안 된다는 이 말씀은 성막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배와 관련된 문맥 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절)


그렇다면 이 말씀이 성막과, 그리고 예배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출애굽기 세 번째 단락의 내용을 이해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전 언급한 바와 같이, 출애굽기 세 번째 단락인 25-40장의 핵심 내용은 성막 건축입니다. 무려 열여섯 장이나 되는 이 긴 내용도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25-31장인데, 성막 건축 명령입니다. 둘째는 32장부터 35:3인데, 금송아지 배교와 회복입니다. 셋째는 35:4부터 40장인데, 성막 건축입니다. 이를 예배와 관련하여 다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25-31장)입니다. 성막과 관련한 모든 내용을 하나님께서 친히 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만 예배해야 합니다. 둘째, 인간이 고안한 예배(32장-35:3)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꼭대기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이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고, 다시 회복하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35:4-40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지시하신 대로 성막을 건축합니다.2)

그런데 각 단락의 마지막이 참 흥미롭게 끝납니다. 첫째 단락(25-31장)인 안식일로 끝납니다. 안식일을 범하면 죽이라는 명령입니다(31:12-18). 둘째 단락(32장-35:3)의 마지막도 안식일로 끝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 본문입니다. 안식일에 불을 피우는 자는 죽이라는 명령입니다(35:2-3). 세 번째 단락이자 출애굽기의 결론은 로 끝납니다. 여호와의 구름이 완공된 성막을 덮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습니다. “여호와의 구름”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되어 이스라엘을 인도한 바로 그 구름입니다. 여호와의 구름은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보입니다. 이 불 구름이 성막에 덮였으니 성막 전체는 마치 여호와의 불, 여호와의 영광으로 활활 타는 궁궐과도 같습니다.3)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을 함께 찾읍시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34)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35)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36)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37)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38)”(출 40:34-38)


마지막 구절(38절)을 한 번 더 읽겠습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38절)


이렇게 출애굽기는 불로 끝납니다. 성막에 가득한 불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으로 충만한 불입니다. 그분의 구름 속에 있는 불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불입니다. 출애굽기는 이렇게 불로 끝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막에는 여호와의 불이 언제나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절)


여러분!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십시오. 성막이 완공된 이후, 이스라엘은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서 각각 세 지파씩 진을 칩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거주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예배 중심의 삶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되면, 이스라엘 각 처소의 모든 불이 꺼집니다. 그러면 불이 하나도 없습니까? 아닙니다. 단 한 곳에는 계속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성막입니다.


먼저, 성막의 뜰(마당)에는 놋으로 만든 제단이 있습니다. 이 제단 위에 짐승을 올립니다. 이 짐승을 태우는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왜 불을 피웁니까? 이 짐승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기 때문입니다. 이 짐승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향한 여호와의 진노의 불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 짐승에게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에 각 처소의 모든 불을 꺼야 합니다. 불을 끄는 것이 이 율법의 목표가 아닙니다. 자신의 처소에 있는 불을 끄고 하나님의 불을 바라보는 것이 이 율법의 목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속의 은혜로 인도하는 것이 이 율법의 목표입니다.


회막 뜰에서 커튼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성소가 있습니다. 이 성소로 들어가면, 왼쪽에 정금으로 만든 등잔대(정금 등대)가 있습니다. 안식일에도 이 정금 등대에는 불이 타오릅니다.

여러분! 광야 생활 중에 여호와의 구름이 멈출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멈추었습니다. 여호와의 구름이 이동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구름을 따라 이동했습니다(참고. 출 40:36-38). 그 구름 속에는 여호와의 영광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이 불만 바라보고 걸어갑니다. 그러면 광야 생활 중에도 길을 잃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제단의 불이 대속의 은혜를 보여준다면, 정금 등대의 불은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보여줍니다. 


이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입구, 즉 정면에는 향을 피우는 향단이 있습니다. 안식일에도 이 향단에는 향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향이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장의 중보 기도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 141:2)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9)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10)”(눅 1:9-10)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3)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4)”(계 8:3-4)


안식일에 이스라엘 각 처소의 모든 불이 꺼집니다. 그러나 제단 위의 불은 활활 타오릅니다. 대속의 은혜입니다. 정금 등대의 불이 여전히 타오릅니다.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은혜입니다. 향단 위의 향이 여전히 타오릅니다. 기도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성막 뜰에는 제단이 있고, 성소에는 순금등대와 향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맨 안쪽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곳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무엇인가를 밝히는 불이 없습니다. 지성소에는 광명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성소에는 광명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9)


성막 제일 안쪽 방, 지성소에는 여호와 자신이 불이 되십니다. 그 바깥 방 성소에는 정금 등대의 불이 밝혀져 있고, 향단의 향이 피어오릅니다. 말씀과 기도입니다. 그리고 바깥 뜰에는 제단의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대속의 불입니다. 그리고 성막 전체를 여호와의 불 구름이 덮고 있습니다. 성막 전체가 활활 타는 불 텐트입니다. 안식일에는 성막 동서남북에 진 치고 있는 이스라엘 각 처소의 모든 불이 꺼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중심에 있는 여호와의 불은 안식일에도 활활 타오릅니다. 

여러분! 낮에도 하늘에 별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는 하늘에 별이 있는 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시골 한적한 곳에 가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수많은 별이 반짝입니다. 언제나 하늘에 있는데도 밤에만 보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안식일에 각 처소에 불을 끄는 순간, 그들은 오직 단 한 곳, 그들의 삶의 중심인 성막에는 여호와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어두움이 가득한 순간에도, 여호와의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온 세상을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안식일에 개인 처소에 불을 피우는 것을 금지하셨습니까? 불을 끄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안식일에는, 이 예배의 날에는 거룩한 성소에서 활활 타오르는 여호와의 불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의 불에만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의 날에는 제단 위에 타오르는 대속의 복음이 강조됩니다. 예배의 날에는 정금 등대의 일곱 등잔에 반짝이는 말씀이 강조됩니다. 예배의 날에는 향단의 향에 타오르는 기도가 강조됩니다. 더 나아가, 예배의 날에는 소멸하는 불이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에도 관심이나 집중이 금지됩니다. 이 거룩한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합니다.


16세기 개혁자 칼빈이 봉사하던 제네바에는 원래 귀족석이 따로 있었습니다. 행여나 예배 중에 귀족이 지각하여 예배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면, 앉아 있던 모든 평민이 일어나 그 귀족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예배 중에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위를 금지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 시간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만 경의를 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만 모든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만이 찬송 받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인간이 가로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설교자에게 주시는 준엄한 경고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강단에는 인간의 온갖 철학과 도덕・윤리적인 설교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날에는 제단 위의 불이 활활 타올라야 합니다. 짐승보다 고귀한 피를 흘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이 설교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때때로 설교자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자신의 의도를 하나님의 말씀에 투영하여 설교려는 충동에 휩싸입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를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나팔로 사용하셔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설교를 듣는 회중에게도 엄중한 경고입니다. 예배 속에는 제단의 불이 타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이 있습니다. 사죄의 은혜가 있습니다. 예배 속에는 정금 등대의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말씀의 인도가 있습니다. 예배 속에는 향단의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기도와 응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배 가운데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배 중에 임하십니다.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십니다. 예배 참석자 중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예배의 날에는 이 외에 다른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고 예배에 참석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을 듣고 사죄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말씀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까? 기도의 응답을 받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 불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를 지성소 안까지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19)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20)”(히 10:19-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 불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만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광야에서 나무를 줍고 있습니까? 다른 불을 피우려고? 다른 불을 바라보려고? 다른 불을 사모하려고?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일곱째 날은 너희를 위한 거룩한 날이니 여호와께 엄숙한 안식일이라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2)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3)”(2-3절)


하나님께서는 거짓으로 예배하는 자를 알고 계십니다. 예배 시간에 나무하는 자를 알고 계십니다. 다른 불을 피우는 자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심판하십니다. 


이제 여러분이 피워놓은 불을 끄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염려와 고난을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그리스도께 맡기십시오. 예배를 사모합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모합시다. 여호와의 불을 바라봅시다. 자신의 몸과 피로 휘장을 찢으신 그리스도를 따라 불이신 여호와를 만나러 들어갑시다. 그분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아멘!




<설교 이해를 위한 질문>

1. 구약의 율법에 대한 잘못된 두 가지 견해가 무엇입니까?

  ①율법주의

  ②반(反)율법주의(율법 폐기론)


2. 다음의 편견 두 가지는 우리가 율법을 엉터리로 읽게 만듭니다.

  ①율법은 문맥과 무관하다!

  ②문자주의(literalism)


3.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까?(출 31:14-15) 그렇게 하지 않은 실례를 말해보십시오.


4. 성경은 안식일을 범하는 모든 사람을 죽이지 않고, 오직 단 한 가지 경우에만 죽입니다. 그 사건이 무엇입니까?


5. 사형 당한 사람은 안식일에 왜 나무를 모았을까요?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습니다.


6. 출애굽기 전체는 세 개의 큰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 어떤 내용입니까?

①1-18장

②19-24장

③25-40장


7. 출애굽기의 세 번째 단락 역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 어떤 내용입니까?

①25-31장

②32장-35:3

③35:4-40장


8. 안식일에 불이 켜져 있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①뜰

②성소

③지성소

④성막 전체


9. 예배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에만 집중해야 합니까? 또한 직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보여줘야 합니까?


10. 안식일에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왜 나무하는 것이 더 큰 죄가 됩니까?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11. 이 말씀이 나와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교제합시다.


12. 한 걸음 더: 사도행전 28장에는 나무를 모아서 불을 피웠으나 죽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죽지 않고 오히려 그를 물고 있던 독사(뱀)가 죽습니다. 그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추종자들로부터 (다른 불을 피우는) 이단자로 정죄 된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가 죽지 않은 것(행 28:3-5)과 사도행전의 결론(행 28:25-31)을 읽고, 누가 과연 이단자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사도행전이 왜 이런 내용으로 끝나는지 서로의 생각을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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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출애굽기 단락

핵심 주제

내용

제1부: 1-18장

구원(출애굽)

바로의 집을 건축하는

노예(slaves)에서 자유인으로

제2부: 19-24장

교회(제사장 나라)

십계명과 시내산 언약

제3부: 25-40장

예배(성막 건축)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종(servants)


2) 출애굽기 25-40장의 핵심 내용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핵심 주제

내용

25-31장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

성막 건축 명령

31장-35:3

인간이 고안한 예배

배교와 회복

35:4-40장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

성막 건축 이행


3) 이후에 솔로몬 성전이 완공된 후에 같은 현상이 재현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성막과 성전에서 발생한 이 사건을 가져와 제2성전 건축을 독려합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10)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11)”(왕상 8:10-11)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슥 2:5)


  • ?
    성심인 2022.05.29 17:18

    안식일에 집에서 음식물을 만든 불은 안 피웠지만 어둠을 밝히는 등불은 켰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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