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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8)

설교제목/ 기도: 감사가 향연처럼 올라가는 예배


설교본문/ 이사야 56:4-8; 디모데전서 2:1-4

주제문장/ 예배할 때 기도의 향연이 끊임없이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라간다.

설교개요/ 예배에 찬송과 함께 기도가 있다. 기도가 은혜의 방편일 수 있다. 구약시대부터 기도하는 전통이 내려왔는데 신약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시작했고, 기도가 공로가 되었을 때 종교개혁은 기도를 회복했고, 기도하는 삶을 살도록 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만이 아니라 몸을 드리는 태도를 보여야 하고, 그런 기도는 향연처럼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간다. 예배때 죄용서받은 후에, 말씀을 선포하기 직전에,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고 난 후에 회중을 위해 기도한다. 기도는 직분자의 일이다. 이 모든 예배기도는 공적인 기도이기에 잘 준비하여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가 간구이기 이전에 감사의 표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 사 56 : 4 - 8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    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    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6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    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8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 딤전 2 : 1 – 4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    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기도가 은혜의 방편일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 여러분, 모든 종교마다 기도가 있습니다. 종교는 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도 기도하곤 합니다. 기독교인의 기도는 이 모든 기도들과 다른 것이겠습니까? 간절함에서 다릅니까?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간절하게 기도하는 타 종교인들이 많습니다. 그 준비와 간절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옛날의 우리 어머니들이 새벽같이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정화수를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하고 손이 닳도록 빌었습니다. 그것과 비교해서 신자의 기도가 아무런 정성도 없이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기도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 기도가 독특한 것은 막연한 신이나 미지의 운명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 우리의 간구를 올려드리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개혁한 교회는 말씀과 성례를 은혜의 방편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은혜가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막 퍼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불러 일으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불러 일으키신 그 믿음을 성례를 통해 굳세게 하십니다. 말씀과 성례야말로 하나님께서 주로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기도를 더 강조하곤 합니다. 말씀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충만하게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도가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있습니까? 기도는 은혜의 방편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아닙니까?
    우리 장로교회의 교리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88문에 의하면 기도도 은혜의 방편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속의 은덕을 끼치는데 쓰시는 통상적인 방도는 그 분이 정하신 것인데, 특히 말씀과 성례와 기도입니다. 이 모든 것이 택함 받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위하여 효력 있게 됩니다.” 기도도 은혜의 방편이라고 말합니다. 아주 도전적인 해석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과도하게 격상시킨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기도는 인간의 막연한 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요 교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기도로 다시금 하나님께 돌려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면서 그 말씀대로 성취해 달라고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말씀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씀 없이 기도만 많이 하면 확실히 이단이 됩니다. 이단 교주들은 다 기도를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기도 없이 말씀만 붙잡고 있으면 죽은 정통이 됩니다. 말씀 붙잡은 기도는 인간의 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재차 선포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방편이 됩니다. 

기도하는 전통이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왔다

    오늘 첫 번째 본문인 이사야서 56장 7절 말씀에 보면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부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전은 제사하는 집인데 왜 기도하는 집이라고 부릅니까? 장차 성전이 이방인들조차 나아와 기도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사는 단지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는 기도였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다음에 낙성식을 하고 나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역대하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바벨론 유수로 인해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가는 곳곳마다 회당을 세워 예배했습니다. 제사를 드릴 수 없었으니 그때부터 기도가 회당예배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세워진 신약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모일 때마다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기독신자들은 유대인들로부터 핍박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신자들은 자신들의 구체적인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어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인 헤롯 왕이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는 사도 베드로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때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는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구출해 주셨는데 기도한 교회는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연약한 기도조차도 이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예배하기 전에 우리는 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예배 시에도 기도가 있습니다. 예배시의 기도는 공적인 기도이기에 사적인 기도보다 더 큰 중요성이 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예배시에 드리는 공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재발견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미사 시 성직자만이 고정된 기도문을 낭송하고 신자들은 기도를 듣기만 하던 것을 개혁했습니다. 종교개혁가들도 공예배시 목사가 모든 회중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회중의 기도를 인도하는 기도라고 이해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종교개혁가들은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신자의 삶 자체가 기도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기도하는 태도도 중요하다

    여러분은 기도의 태도, 즉 몸과 기도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시편 95편 6절 말씀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이게 동양 문화입니다. 우리 한국도 오랫동안 마루바닥 문화였습니다. 바닥에 앉아서 교제하고 놀았습니다. 예전에는 마루바닥에 앉아서 예배했고, 기도할 때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했습니다. 요즘도 기도원 예배실은 대부분 바닥입니다. 그런데 의자가 도입되면서 우리는 바닥에 앉는 것이나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예배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로마가톨릭의 유산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로마교회에서는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또한 성찬의 떡을 받을 때 무릎을 꿇고 받습니다. 어떻게 감히 성체를 서서 받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무릎 꿇고 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성당의 의자는 일반 의자들과 달리 기도하기 편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엉덩이를 놓는 좌석은 낮고 등을 기대는 부분은 높습니다. 등받이 뒤로는 팔꿈치를 놓을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있었고, 등받이 가장 아래쪽에는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도록 바닥으로 내릴 수 있는 평평한 판이 붙어 있습니다.
    개혁한 교회는 이 기도의자를 사용하여 한동안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유럽의 예배당을 구경하신 분들은 알겠지만 예배실 바닥이 묘지였습니다. 주중에 장례식이 있을 수 있기에 평상시에는 의자를 쌓아 놓았다가 예배 때 각자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습니다. 이때 앞 뒤 좌석 간격을 넓게 놓아서 기도할 때 무릎 꿇고 기도할 공간을 확보했습니다. 이후에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면서 공간문제로 앞 뒤 좌석간격이 좁아지면서 더 이상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을 경건의 행위로 생각할 우려가 있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이것은 지나친 반작용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정신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본질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형식의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향연기가 퍼지고 위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


    성경은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향연기에 비유하곤 합니다. 성소에 향단이 있었고, 그 향단에서 끊임없이 향을 피우고 향연기가 자욱했던 것이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구약교회는 그 향연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시편 기자들도 자신들의 기도를 분향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시편 141편 2절에서 이것을 노래합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인은 자신의 기도를 분향하는 것에, 자신이 손 드는 것을 제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손 드는 것도 사실 기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구약 신자들은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분향에 빗댄 이것에 착안하여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는 지금도 예배할 때 예배당을 향연기로 가득 채웁니다.
    신약교회가 세워졌을 때에 교회는 예배때 분향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신전에서 분향하는 것이 일상적이었기에 이교도돌의 예배행태와 기독교회의 예배를 구별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양정서에서도 절에서 분향하는 것, 제사를 지낼 때 분향하는 것을 마귀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분향을 꺼립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 로마가톡릭교회는 분향을 도입합니다. 사제가 향로를 예배당안에 들고 들어가서 예배단 전체를 향연기로 가득 채웠습니다. 9세기 이후로 미사를 시작할 때 향로를 들고 들어가는 것이 정착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제단에도 분향을 했고, 심지어 회중석을 돌면서 회중 전체에게 분향을 했습니다. 말 그대로 예배당 전체가 향 연기로 가득찼습니다. 이런 관습은 요한계시록의 말씀 때문에 더 강화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하늘성전의 장면, 하늘성전에서의 예배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라 들려 있는데, 그 인을 뗄 자가 없었는데 한 어린 양이 나와서 그 두루마리를 취합니다. 그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봉한 인을 뗄 것이라는 것이 예상됩니다. 그 다음 장면이 바로 향 연기가 나는 장면입니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두루마리의 인을 떼면 그 속에 기록된 내용대로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릴 것입니다. 이 심판은 고난받고 있는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바를 성취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늘성전에 향을 가득 채운 금대접이 보였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아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성도들의 기도가 향연기처럼 하늘성전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8장으로 가면 더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첫째 심판인 일곱 인의 심판이 진행되는데 마지막 일곱째 인을 떼자 두 번째 심판인 일곱 나팔 재앙이 시작되려고 하는데 바로 이때 금 향로가 등장합니다. 한 천사가 금 향로에 많은 향을 받았습니다. 거기서는 향로의 향과 성도의 기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앗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이렇게 향과 기도를 구분한 것이 오히려 성도의 기도가 향연기처럼 위로 올라간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항연기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데 기도가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그 향연기를 받으시는 것을 보자 천사가 향로에 제단의 불을 담아서 땅에 쏟습니다. 그러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를 받으시고 이 땅에 심판을 베푸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들으시고는 이 땅에서 일하십니다.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의 손발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기도는 향연기가 두루 퍼져 나가고, 위로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예배는 기도의 향연기가 넘쳐나는 예배, 기도의 향연이 올라가는 예배입니다.   

공적기도는 잘 준비해서 해야 한다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과 즉흥적으로 기도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좋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즉흥기도를 잘 하고, 기도를 길게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을 성령충만의 증거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기도문을 적어서 기도하는 것은 신앙이 깊지 못한 증거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은 다분히 경건주의적입니다. 개혁은 양 극단을 경계했습니다. 로마교회식의 정형화된 기도문으로만 기도하는 것을 경계했고, 다른 극단인 재세례파식의 주장, 즉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해야 하기에 즉흥기도만 강조한 것도 경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인도가 중요하지만 교회의 구체적인 필요를 구하는 치밀함이 필요합니다. 즉흥기도를 하다가 신앙고백과 배치되는 기도를 하기가 쉽습니다. 기도문을 준비해서 그것을 읽는 것에만 익숙해져서 성령의 인도를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적절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좋은 기도문을 통해 기도를 배워가야 하고, 성령의 인도에 민감한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공적 기도에서 자유가 주어져야 하고, 그렇다고 그것이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종교개혁의 기운이 확산되면서 점차로 설교 전에 하는 기도가 즉흥기도로 바뀌고, 길이도 길어졌습니다. 잉글랜드의 청교도와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은 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을 싫어하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즉흥기도를 강조했습니다. 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것은 죽은 기도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즉흥적으로 기도하는 것만이 살아있고 능력있는 기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예배시 주기도문을 사용하는 것조차도 꺼려했습니다. 17세기 말에는 길게 기도를 이어갈 수 있는 ‘기도의 은사’를 받은 이들이 아니면 교회 직분자로 선출되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공적 기도는 성경적이어야 하고 신앙고백에 충실해야 합니다. 공적 기도는 기도자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이나 사상을 자랑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평상시 하고 싶었던 말들을 기도시간을 통해 늘어 놓기도 합니다. 듣는 이들이 참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예배에서의 기도 인도자는 공적인 임무를 맡았습니다. 사인(私人)이 아니라 공인(公人)으로 기도합니다. 기도 인도자는 성경과 신앙고백을 재해석해서 읊조려야 합니다. 기도는 일종의 성경해석이요, 고백의 한 방식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참 신학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참 기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기도를 설교시간으로 착각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설교만으로도 충분한데 기도조차 설교시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공기도는 하나님의 회중을 가르치는 시간이 아니라 회중을 대표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회중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성도의 교제가 풍성하지 않으면 공기도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가 풍성하지 않으면 참된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만 늘어 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기도도 홀로 외롭게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안되고 성도의 교제의 기반 위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공기도는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배 때에 여러 번의 기도가 있다

    예배 때 몇 번의 기도가 있습니까? 공예배순서를 한번 보십시오. 몇 번의 기도가 있습니까? 종교개혁가들은 공예배에 세 번의 중요한 기도를 배치했습니다. 첫째는 ‘죄 고백의 기도’입니다. 예배가 시작하는 부분에 십계명을 읽고 난 다음에 죄를 하나님께 고하는 기도였습니다. 

    둘째는 설교 전에 하는 기도인데 ‘조명을 위한 기도’라고 부릅니다. 이 기도는 말씀을 여는 것과 성령께서 그 말씀선포를 통해 회중의 생각과 마음을 조명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런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와 설교할 목사는 성경봉독 후 설교하기 직전에 이 기도를 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열어 주셔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조명을 위한 기도를 할 때 목사는 자신에 대해서도 기도하곤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목사가 평상시에 이 조명의 기도를 하지 않다가 어느 주일에 이런 기도를 한다면 아마도 설교준비를 잘 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목사의 마음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자신이 준비하지 못했던 것까지 즉석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준비가 이미 끝났고, 설교문이 나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까? 그렇습니다. 설교는 잘 준비된 설교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설교를 사용하시는 것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기도는 설교 후에 하는 기도인데 ‘중보하는 기도’라고 부릅니다. 이 세 번째 기도에 들어가야 할 세 가지 중요한 기도의 영역이 있습니다. 우선은 회중의 구체적인 필요를 위해 구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디모데전서 2장 2절에 나와 있듯이 ‘정부를 위한 기도’가 포함됩니다. 이와 관련된 기도문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주님,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대통령과 정부와 시의 모든 관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의 직무수행을 통해 만왕의 왕께서 그들과 그들의 국민들/시민들을 통치하시기를 구합니다. 주의 종들인 그들이 불법의 나라인 사단의 나라를 대항하도록 하옵소서. 그들의 통치의 보호 하에 우리가 모든 면에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 경건하고 존경할만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이 중보기도에는 복음을 대적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한 기도가 포함됩니다. 역시 기도문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망도 주님도 없이 살고 있는 유대인들과 회교도들과 이교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자신들을 기독교인들이라고 부르지만 교리와 삶에서 주의 진리로부터 빗나간 자들을 위해 간구하오니 그들이 진정한 복음을 받게 하옵소서.”
    설교 후의 이 중보기도는 제일 긴 기도입니다. 소위 말하는 ‘기독교의 모든 필요를 구하는 기도’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 중보기도의 실제적인 성격을 고려해서 개혁한 교회는 주로 설교 후에 넣었고 예배인도자가 기도를 했습니다. 말씀의 선포 후에 그 말씀에 근거해서 기독교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예배 때 설교하는 것이 목사의 주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목사는 기도를 인도하는 일도 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예배 때 목사가 하는 기도를 ‘목회기도’라고 부르는데, 이 목회기도가 바로 개혁자들이 말한 설교 후의 중보기도입니다. 목사는 성령의 감동 가운데 교회와 신자, 그리고 이 땅의 모든 필요를 잘 계획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기도가 좋은 예가 되어서 교인들이 가정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배웁니다. 목사는 기도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설교 전에 대표기도를 넣었고, 장로가 기도하는 전통을 세웠습니다. 우리는 장로가 교회를 말씀으로 돌아보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예배 때 이 중보기도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집사에게까지 이 중보기도 인도를 확대할 수 없을까요? 아마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목사, 장로가 당회를 이루어서 교회를 다스리고 돌아보는 일을 하기에 공예배에서의 기도는, 특히 목회기도는 목사와 장로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집사직도 중요합니다. 집사직도 교회를 돌아보는 일을 합니다. 집사직은 정서적이고 물질적인 부분에서까지 교인들을 돌아봅니다. 그렇다면 집사직에까지 이 중보기도, 목회기도를 확대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상으로 예배 속의 기도들이 다 언급되었습니까? 예배에 더 많은 기도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교회는 예배시작부터 묵상기도로 시작합니다. 설교 후에 회중이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순서를 가지기도 합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기도가 통성기도인데, 이것을 지나치게 낮추어 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간절함을 표현하는 방법 중에 하나이기까요. 공예배에서는 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무엇보다 유의해야 합니다. 헌금한 후에 목사가 봉헌물을 들고 기도하면서 복을 빌어 주기도 합니다. 이 기도를 잘 하지 않으면 헌금이 줄어든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감사기도내용을 적게 하고, 그 감사의 내용을 일일이 읽어 주시고 합니다. 그것이 교육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 저런 것을 가지고도 감사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 감사의 제목을 주보에 적기도 합니다. 그리고 십일조한 분들의 성함을 불러서 기도해 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빠졌는데 ‘주기도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보다 더 나은 기도가 있겠습니까? 예배에서 주기도문은 어디에 위치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한국교회에서는 주기도문을 주일낮예배 외의 각종 경건모임을 마치는 순서로 사용합니다. 주일오전예배 마지막 찬송을 주기도송으로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역사를 보면 목회 기도 이후에 이어서 주기도문을 온 회중이 같이 낭독하곤 했습니다. 목회기도 기도 후에 ‘이어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로 기도하오니’라고 말하면 온 회중이 다같이 주기도문을 낭독하곤 했습니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감사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감사일 것입니다. 기도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복창하면서 모든 필요를 구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오늘 둘째 본문인 디모데전서 2장 1절에서 중보기도에 관해 언급하면서 감사를 언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라고 한 후에 중보기도의 내용을 말합니다. 여기서 간구, 기도, 도고, 감사는 기도의 종류를 말하기도 하겠거니와 모든 기도가 감사로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과 17절에서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기도도 감사로 하고, 찬송도 감사로 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감사함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성부께서 성자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베풀어 주신 말로 다할 수 없는 모든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신자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말씀에 대한 복창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 외에 자신이 만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중보의 기도를 할 때도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송영을 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감사는 기도의 요소 중에 하나 정도가 아니라 모든 기도를 지배해야 하는 정신입니다. 기도가 곧 감사입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부, 감사의 파트에서 주기도문 해설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찬양의 제사입니다. 기도의 최고봉은 하나님을 불러 찬송하는 송영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늘 성찬식이 있는데 성찬식은 기도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성찬상은 제사상이 아닙니다. 성찬은 우리의 희생을 주님께 보여드리는 시간이 아닙니다. 성찬상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모든 은덕을 누리도록 초대해 주시는 기쁜 식탁이요 잔치상입니다. 이 성찬상에는 간구와 감사가 넘쳐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서 성찬식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와 하나가 되신 것을 크게 기뻐하면서 성찬상으로 나아갑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속히 임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성찬식 기도문에 나와 있듯이 우리의 낮은 몸도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화시켜 주실 것을 구하면서 성찬상에 참여합니다. 성찬식에는 풍성한 기도와 간구, 넘치는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저희들은 무언가 필요한 것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지만 돌아서면 자신이 무엇을 구했는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지 의문을 품을 때도 많습니다. 그런 저희들을 불러 주셔서 온 회중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의 거룩한 몸을 이루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게 하시니 웬 은혜인지 모르겠습니다. 예배 속에 기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가 곧 찬양이고 예배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회중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기도를 사적인 경건 행위 정도로 이해하여 우리의 고집이 굳어지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복창하는 것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편이 되게 도와 주옵소서. 어떤 기도라도 우리가 홀로 소원을 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늘 기도하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묵상하고 나누기

1. 기도가 은혜의 방편일 수 있습니까? 

2. 성전에서부터 시작된 기도의 전통을 말해 보세요.

3. 종교개혁이 기도를 어떻게 회복했나요?

4. 예배 때 있는 기도들, 특히 중보기도에 대해 말해 보세요.

5. 목사는 기도와 관련해서 어떤 역할을 합니까?

6.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과 즉흥기도에 관해 말해 봅시다.

7. 기도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감사라는 것을 삶에 적용해 봅시다. 

어린이를 위한 질문

1. 기독교의 기도의 특징은 간절함에 있다, 맞습니까?

2. 기도문 없이 즉흥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신앙이 깊은 것이다, 맞습니까?

3. 기도는 (   )함으로 모든 필요를 구하는 하나님과의 (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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