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당한 예배 세상의 소망 9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영혼을 쏟아 일하라(에베소서 6장 5~9절)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영혼을 쏟아 기쁘게 일합시다. 직장 일, 집안 일, 학교 공부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 영혼을 쏟아 기쁘게 직장 일을 합시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학생들은 영혼을 쏟아 기쁘게 공부합시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영혼을 쏟아 직장이 없는 분들은 기쁘게 직장을 찾도록 준비합시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 영혼을 쏟아 기쁘게 집안일을 합시다.
대개 일에 대해서 생각하면 돈 버는 것만 생각합니다. 공부하면 일등 하고 좋은 대학 가는 것만 생각합니다. 가사 일은 빨리 끝내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가 직장에서 일할 때, 공부할 때, 가사 일을 할 때, 그와 동시에 주님을 기쁘게 섬기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참으로 신비입니다.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먹는데 어떻게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어떻게 우리를 채우시는지, 바로 이 신비입니다. 믿고 성찬에 참여할 때 그 순간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시죠? 성찬의 순간에 성령께서 새로운 기쁨과 은혜를 주시는 것을 체험하시죠?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기쁘게 일할 때 그냥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월급만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깁니다. 주님을 기쁘게 합니다. 공부할 때도, 가사 일을 할 때도 우리 몸은 육체 활동을 하고 정신 활동을 하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할 때 저는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하면 직장에서 잘 생활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들, 노하우들을 좀 가르쳐주려고 열심히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준비하면 준비할수록 직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거의 한마디도 없습니다. 거의 모든 말씀이 주님을 어떻게 섬길지 말하고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우리 생각을 완전히 바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돈 많이 벌고, 어떻게 승진하고, 어떻게 보고서 잘 쓰고, 어떻게 일등 해서 좋은 대학 가고,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가장 핵심적인 알맹이는 바로 그 일 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것임을 오늘 본문은 계속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과 같은 것은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아도 회사에서 배웁니다. 회사 사장님이 여러분 회사 기강이 조금만 흐트러지면 위기의식을 만들어서, 우리 회사 망한다 하면서, 업무 효율성을 높이게 합니다. 그런 것은 또 리더십 과정에서 배우면 됩니다. 아이들 공부 어떻게 잘 하는지는 선생님께 배우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다른 어디에서도 못 배우는 것, 곧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영혼을 쏟아서 기쁘게 일하라! 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고대 노예들에게 한마디로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주님은 노예제도를 싫어하십니다. 노예제도를 좋아하신다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아담 옆에 노예 한 명을 창조하셨을 겁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평등합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고, 욕심 때문에 아담의 후손들이 노예제도를 만들어냈습니다. 하나님이 노예제도를 아주 싫어하시지만, 그냥 허락해주고 있습니다. 워낙 사람이 악하니까 바깥만 뜯어고쳐서는 안 될 문제입니다. 어떻게요? 영혼의 중심을 뜯어고치면 자연적으로 바깥도 뜯어고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예제도를 아주 싫어하시지만, 그냥 남겨 두고 주님은 뭘 하셨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면 노예제도는 차츰차츰 없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노예 해방운동을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회에 와서 노예 주인과 노예가 같이 형제라고 이름을 부르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노예제도가 자연히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주님은 노예제도를 좋아하시는구나”, “주님은 회사 사장님이 자기 직원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것을 좋아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일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아주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인에게 순종하라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주님께 복종하라! 그것이 핵심입니다. 말씀을 잘 읽어야 합니다. 주님께 복종하기 때문에, 지금 노예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님께 순종하기 때문에 현재 제도 속에 들어가서 주님에 대한 순종을 노예제도 속에서 나타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지금 이 시대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너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노예처럼 천한 일을 하든지, 혹은 사장이 너희를 노예 취급을 하든지, 지금 너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너는 그 사람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스도의 종답게, 자부심을 가지고 휘파람 불면서, 유쾌하게 영혼을 쏟아서 기쁘게 일하라, 공부하든지, 가사 일을 하든지.” 더 이상으로 다른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나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신비감만 남겨 둡니다.
마치 성찬 때 성찬의 빵과 포도주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오시는지는 설명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 설명하지 않습니까? 믿고 순종하는 자는 그 은혜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내 일을 힘껏 하는 것이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섬기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영혼을 쏟아서 기쁘게 일합시다. 기쁘게 공부합시다. 기쁘게 가사 일을 합시다. 주님이 주인으로서 섬김을 받으십니다.
첫째로, 일터에서는 영혼을 쏟아 일하면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섬깁니다.
둘째로, 일터에서 일하는 것은 그냥 지금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성도 하나하나를 위해서 영원 전부터 예정하신 예정의 뜻을 이루는 한 과정입니다.
1. 일터 : 영혼을 쏟아 일하며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섬긴다.
5절에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보십시오.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라”라고 했지만, 핵심은 무엇입니까?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것입니다. 노예들에게 지금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노예들은 누구냐 하면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순종했던 그리스도인입니다.
“너희들, 주님께 그렇게 하고 있지? 그 마음 그대로, 너희들 예배 때 그렇게 했지? 그 마음 그대로, 직장에 가서도 그대로 하라”고 합니다. 직장이니까, 그 마음을 싹 바꾸어 버리면 안 됩니다. “주님, 바이 바이! 주님, 관계없어요. 어쨌든, 승진해야지. 거짓말해서라도 승진해야지. 어쨌든, 성적 잘 받아야지. 훔쳐보더라도 성적 잘 받아야지. 아이구! 가사일 이거 지긋지긋해. 밥 먹고 나면 또 치워야 하고. 이거 끝이 없어. 표시도 안 나고.”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들이 주님을 섬길 때, 두려워하고 떨고 성실한 마음으로 했지? 가사 일 할 때도, 공부할 때도, 일할 때도 그대로 해라. 왜냐하면 육체적으로 너희가 일하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일하고 있지만,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너희와 같이 함께 있어.”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야기했습니다. 직장에서도, 공부할 때도, 가사 일을 할 때도 항상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하고 자부심을 지니고 일합니다. “그리스도의 노예다!” 하고 자부심을 지니고 일합니다. 그때 노예들은 짐승 취급을 당했습니다. 주인이 원하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여성은 성적 노리개가 되기도 했습니다. 같이 살다가도 주인이 팔아버리면,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과 헤어지고, 자녀와도 헤어지고, 그게 노예 인생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같은 노예란 말을 써서 너희들은 마르쿠스의 노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란 말은 어디에 썼냐 하면, “그리스도의 종 모세, 그리스도의 종 다윗”에 썼습니다. “너희들은 너희가 너희를 부르는 그 노예가 아니라, 주님이 너희를 부르시는 주님의 노예다. 주님의 노예로서 자부심을 지니고 일하라”라고 합니다. “어떻게 너희들이 거짓말을 하고, 사람이 보지 않는다고 그렇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냐, 너희들은 주님의 노예다!”
왜 그 말을 하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7장 17절이 이유를 말합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7장 22절에서는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실 때, 어떤 사람은 종으로 불러주었습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종으로 불렀습니다. 이 시대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불러주실 때, 어떤 사람은 굉장히 큰 회사의 사장으로 불러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단 직원으로, 어떤 사람은 실직자로 불러주셨습니다. “운이 없어서 내가 이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께서 나누어주셨다.”라고 생각하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주님께서 “너는 노예 상태로 태어나게 하셨고, 주께서 너에게 노예라는 것을 나눠주셨다”라고 합니다. 나누어주신 것, 불러주신 것, 다른 말로 하면 직분입니다. ‘노예라는 직분을 주셨다, 너희에게. 주께서 주신 직분으로 일하라’고 합니다. 섭리 가운데 주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고 떨며”라고 말합니다. 원래 성경에서는 “두려워하고 떨며”는 사람한테 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떨며...” 시편 2편 11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즉, 두려워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워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며 떠는 것은 그냥 무서워서 떠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해서 떨며, 그 은혜를 통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우리가 불경을 저지를까 봐 떨면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 시편 2편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고 사도행전 4장 25~26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두려워하고 떠는 것이 구원받은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은혜로 구원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계속 구원하여 성장하게 하시는데, 우리에게도 두려워하고 떨며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어떻게요? “복종하여”. 바로 노예로서 직분에 충실하는 것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입니다. 불순종하고 교만한 사람을 노예 신분을 통해서 순종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구원을 이룬다는 이 말은 여성에게도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15절,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해산함이라는 것은 ‘자녀를 양육하고 가사 활동을 함으로써’라는 뜻입니다. 여성들은 자녀를 양육하고 집안일을 하는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체험합니다. 교만했던 내가 낮아지고, 애들이 말 안 듣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말 안 듣던 불순종한 모습을 회개합니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애를 먹였던 것을 생각하면서 회개합니다. 가사 활동을 통해서, 자녀 키우는 일을 통해서 구원을 체험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노예 주인에게 순종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힘들고 고역이고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지만, 그 순간에 그를 불러주신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실한 마음으로”. 성실한 마음은 고린도 후서 11장 3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이라는 뜻입니다. 대충 눈가림만 하지 않고 내 영혼과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일합니다. 이 단어는 고린도 후서 9장 11절에서는 구제할 때 “너그럽게” 하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진실하게 일하는 사람은 노예 주인에게도 너그럽게 일해줍니다. 마음을 다해서 성심성의껏 일해줍니다. “아, 우리 회사 올해도 또 경기 안 좋다고 월급 깎아서 대충대충 해야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은 회사 사장님께도 후하게 해주는 겁니다. 마치 가난한 사람 구제해주듯이, 후하게 해줍니다. 서비스를 제공할 때 후하게 해줍니다. 얼마나 복됩니까? 여러분이 월급 적게 받는 직원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 앞에 떨며 두려워하면서 그리스도 앞에 진실함으로 일할 때, 주께서는 여러분을 쓰셔서 마치 구제하듯이 후하게 여러분 직장에서 일하게 하시니, 이게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는 반드시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을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두려워 떨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직장에서 후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사람은 능력이 좀 부족하더라도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께서 그의 실력을 키워주신다는 약속까지 들어있습니다. 마음껏, 성의껏 일하고, 여러분 때문에 회사가 정말 부도 위기를 넘기고, 여러분 때문에 직장이 활기 있고, 여러분 때문에 직장 동료들이 정말 살맛 나는 직장, 그것은 두려워하며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하는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적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거기에 나타냅니다. 빵이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듯이, 여러분이 일하는 모습은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6절, “눈가림만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 뜻을 행하고”.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일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직장에서 일하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일하라는 뜻이 더 중요합니다. 눈가림만 해서 하나님께 종노릇하지 말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 뜻을 행하라고 합니다.
만약 성찬의 떡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로 변한다고 믿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가 노예라면 자기 눈에 보이는 주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똑같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 성찬을 잘못 아는 사람, 빵이 진짜 예수님 몸으로 바뀐다고 믿는 사람은 빵 대신에 직장에 무엇이 있습니까? 노예 주인이 있고, 직장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있고, 일이 있습니다. 특히 직장의 높은 사람이, 사장님이 주님과 똑같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너희 사장을 주님과 똑같이 받으라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어떻게 그런 불경한 태도를 지닐 수 있습니까?
반대로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사장님은 주님과 아무 관계 없어. 직장에서 내 자유대로 할 수 있지, 난 구원받은 사람이니까.” 실제 그런 태도를 지닌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찬에서 빵은 주님과 관계없고 상징이라고 믿은 사람, 재세례파는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농노, 이런 경제적인 억압 체계, 다 필요 없다!”라고 하면서 혁명, 농민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시대에도 그리스도인 중에 누가 성찬을 잘못 이해하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회사 사장님은 주님과 아무 관계 없어. 이 시간을 절약해서 성경 많이 읽어야지. 어쨌든 이 시간에 전도를 많이 해야지. 전도하고, 성경 읽는 것만이 주님 일이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직장에서 사장님을 정말 예수님처럼 높이 섬기지만 예수님은 아닌 것으로 바로 압니다. 사장님을 예수님처럼 높이 섬길 때 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내 사장님과 예수님이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몸으로는 사장님을 예수님처럼 섬기지만 내 영혼은 절대 사장님보고 예수님이라 하지 않습니다. 고대 노예인 그리스도인은, 로마 황제를 주님처럼 신으로 높이고 잘하라고 할 때 거절하면서 순교를 당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이 상관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를 가르칩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 아니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나의 주님이야.”라는 분명한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동시에 직장 상사가 시키는 일을 하면서도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냐?” 하면서 불순종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섭리 가운데 나를 이 직장에 불러주셨고 이 직장에서 일하게 하셨기 때문에 너무 유치해 보이고 불합리한 일을 명령하더라도, 일단은 상사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동시에 섬깁니다. 바로 그런 일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주님의 뜻을 행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많이 고민하는데요. 간단합니다. 내일 직장에 가서 여러분 상사가 시키는 일, 바로 그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거기 앉아서 주님의 뜻이 무언가 생각하지 마세요. 바로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 일을 하면 주님의 뜻을 깨달을 것입니다. 학생들도 주님의 뜻이 뭘까? 고민하지 마세요. 물론 앞으로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어떤 직업을 가질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학교에 가면서 주님의 뜻이 뭘까? 생각하지 마세요. 영어공부 열심히 하고, 수학 공부 열심히 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들으면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뜻이 바로 그겁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에서 주님의 뜻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거룩함은 “곧 음란을 버리고” 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합니다. 성은 결혼 안에서만 있는 것이고, 음란물 안 보고 깨끗이 자기를 지키는 그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절에서는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합니다. 자기 힘으로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직장이 없어서 찾는 분, 얼마나 힘듭니까? 비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아니면, 여러분이 대학에 지원해서 떨어지고 다시 재수한다면 비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게 주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힘들더라도 내가 스스로 벌어먹기 위해서 땀 흘려 일하고 준비하는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지금 직장에서 일하는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일하지 않는 분들은 빨리 일을 시작하십시오. 한 시간에 만 원 벌더라도, 8천 원 벌더라도 빨리 일하십시오.
물론 주부들은 집에서 일하는 것이 이미 몇만 원의 가치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십시오. 그러나 아직 땀 흘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빨리 나가서 일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 일을 할 때 우리는 신비하게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2. 일터 : 하나님이 성도를 위해 예정하신 뜻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 하나님 앞에서 선 개인, 가정, 교회, 기업
오늘 말씀 5, 6, 7절에 ‘마음’과 ‘목숨’과 ‘좋은 뜻’ 세 단어가 쓰였습니다. 5절, “성실한 마음으로”, 6절, “마음으로”, 7절, “기쁜 마음으로”. 이 세 단어가 어디에 나오냐 하면,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마음과 목숨과 뜻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 마음을 다해서 이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죄 용서하셨기 때문에 나는 목숨을 다하여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좋은 뜻을 가지고 성령님께 순종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 사랑을 어디에서 실천할까요? 직장에서 사장님에게, 직장에서 그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사람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라고 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1, 5, 9, 11절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9절,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11절에서는 “그의 뜻의 결정대로” “예정을 입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여기 있는 여러분 한 명, 한 명을 영원 전에 예정하신 것이 하나님 뜻이었습니다. 예정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직장에서 여러분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힘껏 일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영원 전에 계획된 것이고, 그 영원 전에 있는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을 예정해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 예정된 여러분이 구원을 받아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 뜻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 6장 8절에 보면 “무슨 선을 행하든지”라고 했는데, 직장에서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사장님이 회사 경영을 잘하는 것, 그것이 선한 일인데 그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2장 10절,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전에 우리를 예정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일을 하도록 예정하셨습니다. 그 예정 가운데 여러분을 구원해주셨고, 월요일부터는 그 선한 일을 하도록, 6장 8절에서 말한 대로,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으로서 하든지, 말단 직원으로서 하든지, 사장으로서 하든지 직장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예정하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4장 28절에서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합니다. 땀 흘려 일하는 것을 선한 것이라고 합니다. 29절에서는 “선한 말을 하여”라고 합니다. 직장에서 땀 흘려 일해서 내 가족을 부양하고 섬길 수 있는, 이 선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예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 공로로 예정해주신 것입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 더러운 말을 하지 않고 선한 말, 덕을 세우는 말을 하며 살도록 불러주셨습니다. 사장님이 여러분에게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리스도 몸이기 때문에 선한 말을 하도록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직장 사람들은 음란과 더러움에 빠진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거기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있기에 그리스도의 찬란한 빛을 비추도록 불러주셨습니다. 바로 5장 9절에서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에 있다고 했습니다. 5장 10~11절에서는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라고 합니다. 직장에서 사장님이 하라는 것을 무조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을 해야 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No! 나는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책망합니다.
직장에서 어두운 일을 하고 있을 때 정말 힘을 다해서 막지만 할 수 없을 때는, “사장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해고하세요.” 해고당할 각오를 하고 책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사 사장님을 주님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라고 직장으로 불러준 것이니까 주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직장 사장님께 순종합니다. 주님의 뜻과 배치되는 어두운 일을 하라고 거기로 불러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여러분의 직장에 어둠이 많다는 것을 아십니다. 아마 어두운 일에 하나도 참여하지 않으려면 당장 사표를 써야 할지도 모릅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분도 어두운 일에 조금도 참여 안 하려면 당장 회사를 그만둬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아십니다. 어둠과 싸우려는 여러분의 투쟁을 귀히 여기십니다. 그렇게 발버둥 하는 데도 직장과 회사 경영에서 아직 어두운 것을 다 없애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투쟁을 귀히 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우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정도 이상 될 때는 “안 되겠다”라고 결심합니다. 사업을 접거나 사표 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작은 어려움과 싸우는 여러분을 참으로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은 책망하면서 직장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드러내는 자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그 일을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셔서 성실히 하지만 여차하면 정말 주님의 뜻에 배치될 때는 언제라도 버립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주님으로부터 받을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주님의 뜻대로 하다가 승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업이 안 되고 망할지라도 주님께 받을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결코 여러분을 굶기지 않을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십시오. 일을 안 하지만 창고에 쌓아 두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먹여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어두움과 싸우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성실히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받지 못한 것은 천국에서 주실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4절에서는 “기업의 상”, 곧 하늘의 기업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업이 잘되고 월급을 더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 나라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이 큰 것을 받았기 때문에 작은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는 것. 우리는 직장에서, 사업에서, 언제든지 망할 준비하고, 해고될 준비하고 일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천국이 있기에 더 열심히 일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줄 알기 때문에 영혼을 쏟아서 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직장에서 맡은 일이 주님의 뜻에 반대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다’ 생각하면서 영혼을 쏟아서 합니다.
사장님께 영혼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은 오직 주님께만 드리고, 다만 직장은 내 영혼을 쏟아놓는 현장입니다. 열정을 쏟아놓는 현장입니다. 그러나 결코 내 깊은 영혼은 사장님께 주지 않습니다. 내 일에 주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가장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지만, 직장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압니다.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직장보다는 적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가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직장은 바꿀 수 있지만, 아내와 남편은 바꿀 수 없습니다. 아들, 딸은 무를 수 없습니다. 영원히 함께 가기 때문에 가정을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쨌든 사장님께 이야기해서 가정에서 시간을 낼 수 있도록, 가정을 세울 수 있도록 그렇게 집요하게 일하면서 삽니다.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결혼기념일에 아내와 휴가를 가기로 했다면 그것을 따내려고 죽을 듯이 일합니다. 그래서 사장님께 “지난번 다른 사람들 휴가 갈 때 저는 휴가 안 가고 일했잖아요. 이번에 휴가 가게 해주세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계속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일하는데, 그래도 어느 순간 가정을 지킬 수 없다면 사표를 냅니다. 사표 내고 주께서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직장으로 인도하시기를 구하고 주시면 그곳으로 갑니다.
직장과 가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교회에서는 적은 시간을 보내지만, 교회 예배가 더 중요한 줄 압니다. 어찌하든지 주일예배를 충분히 드릴 수 있도록 6일 동안 힘껏 일합니다. 형제 한 분이 몇 개월 전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저에게 이야기하더라고요. “일주일 동안 땀 흘려 일하지만, 주일에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을 바라보며 기쁘게 일합니다.” 주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책잡히지 않도록 땀 흘려 일해야 합니다. 영혼을 쏟아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직장에서 영혼을 쏟아 일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서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 두라”라고 합니다. 그 대답할 것이 무엇입니까? 선한 일을 쌓아 놓으라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여러분에게, “너 왜 계속 교회 가려는 거야?” 하고 말할 때 대답할 것을 쌓아 두라는 것입니다. “사장님 보세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잖아요. 같은 시간을 일해도 훨씬 더 많은 결과물을 냈잖아요.” 그렇게 승부를 걸라는 것입니다. ‘너 왜 교회 가느냐?’ 물을 때, 물론 천국에 관한 소망을 말로 답변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직장에서 말할 수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는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 자체입니다. 그것을 계속 쌓아 두라는 말입니다. 누구보다도 충성 되게, 누구보다도 효율적으로 일을 해서 딱 신임을 얻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의 에너지입니다.
목사는 말을 가지고 전하지만 여러분들은 직장에서 영혼을 쏟아 일하는 것을 통해서 전도합니다. 그런데 예배를 위해서 그렇게 직장 일에 힘쓰고 필요하면 조정도 해 보지만 그래도 예배를 못 드리게 되면 어느 순간 직장을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지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고전 10:31). 사람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했는데, 직장이 없더라도 말씀에 순종하면 살려주신다는 것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책임집니다. 정말 우리 성도님이 말씀대로 하다가 해고를 당하면 우리 교회는 여러분을 위해 특별 헌금을 해서 여러분의 실직수당을 우리 교회에서 만들 것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받아주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해고를 당했다면 여러분 가정을 교회가 책임질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주일예배를 위해서 할 수 없이 직장을 포기해야 한다면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까지 우리 헌금을 나눌 것입니다. 구제헌금은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된 사람을 위해서도 나누는 것입니다. 나눔 헌금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영광의 폐업 처분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여러분, 영광의 실직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여러분을 두 손 들고 환영할 것입니다. 인생의 낙오자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 손 들어 환영할 것입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하늘을 쳐다보니 주님께서 일어서서 스데반을 응원했습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그렇게 응원하기 때문에 교회도 여러분을 응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