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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순서를 통해서 보는 합당한 예배 6

설교제목/ 고백과 율법이 살아있는 예배


설교본문/ 신명기 4:10-14; 로마서 10:10-15

주제문장/ 예배 때 회중은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을 받는다.

설교개요/ 예배에는 고백(↑)과 율법(↓)이 있다. 예배의 첫 번째 파트인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에 신앙고백을 올려 드리고, 예배의 두 번째 파트인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십니다’를 이끄는 순서로 십계명낭독이 있다. 우리는 고대의 3대 공교회신경을 고백하면 좋을 것이고, 두 개의 십계명을 돌아가면서 선포하면 좋겠다. 신앙고백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패스워드와 같고, 십계명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언약의 말씀들이요 감사의 중요한 한 요소이다. 우리는 고백과 율법이 살아있는 예배와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다.  



■ 신 4 : 10 - 14

10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11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에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불길이 충천하고 어둠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12 여호와께서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말소리만 듣고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 

13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1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가 거기로 건너가 받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롬 10 : 10 – 15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고백과 율법이 예배순서에 등장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성도 여러분, ‘예배부름’으로 예배가 시작됩니다. 이 예배 부름을 따라오는 순서가 ‘기원’. 즉 하나님의 인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를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복이 가득 담긴 인사말을 해 주십니다. 인사말 다음의 순서가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사말을 듣고는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첫 번째 찬송을 합니다. 이 예배부름, 복의기원, 경배찬송을 ‘예배 시작의 3가지’라고 부릅니다. 예배 시작 순서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합니다. 예배시작 순서들은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로 들어가는 출입구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궁전 문을 힘껏 열어 젖히는 것이 바로 이 예배 시작 순서들의 역할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예배시작 순서들을 뒤따르고 있는 신앙고백과 율법선포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율법인 ‘십계명’이 예배 중에 포함되어 있을까요? 한국교회 교인들은 신앙고백, 특히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예배를 상상하기 힘들 것입니다. 예배 중에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많은 분들이 ‘그 교회는 이단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배 때 사도신경을 고백하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참 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신경은 성경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데 말입니다. 반면에 예배 중에 율법, 특히 십계명을 낭독하는 것을 보면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것보다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신약교회가 왜 십계명을 예배 때마다 낭독하지? 참 이상한 교회네. 구약시대로 돌아가려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개혁한 교회는 주일에 두 번의 예배를 했습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렸던 것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개혁자들은 주일 오전예배와 오후예배를 한 쌍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일 예배는 오전예배와 오후예배 두 번이어야 하고 두 예배는 짝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개 오전예배에 율법을 넣었고, 오후 예배에는 신앙고백을 넣었습니다. 십계명과 사도신경이 한 번의 예배 때 다 있다면 너무 많은 요소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가지가 다 있으면 예배가 과잉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예배 한 번에 이 두 가지를 다 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예배 순서를 보면 신앙고백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라는 예배시작 파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곧 이어 십계명이 나옵니다. 이 십계명선포는 예배의 두 번째 파트, 즉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십니다’라는 파트를 이끌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패스워드와 같다
    먼저 신앙고백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오직 성경’을 믿는데 왜 성경에도 없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일까요? ‘오직 성경’을 아주 좁은 의미에서 이해하는 교회들은 사도신경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성경을 믿어야 하는데 왜 성경에도 없는 사도신경을 예배 때마다 고백하느냐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공예배 때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단이라고 보면 안됩니다. 게다가 신앙고백에 사도신경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예배 때마다 신앙고백이 꼭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는 처음부터 고백하는 교회요, 예배에서 고백이 적절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로마서 10장 10절 말씀에서도 입으로 시인하는 것, 고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기독교신앙은 내적 성찰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변화되어야 하지만 자신이 내적으로 성찰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심리종교, 성찰종교가 아닙니다. 내적으로 성찰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여기서 시인한다는 단어는 같은 것을 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위 말해서 복창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자주 하는 것인데요. 군대는 전쟁을 해야 하니까 명령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복창을 하도록 합니다. 지휘관이 명령을 하면 하급자들이 그 명령을 그대로 따라서 반복합니다. 또씨 하나 틀리지 않게 반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하게 알아들었다는 서로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시인입니다. 복창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느 시대에나 삼위 하나님을 동일하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 시인이 공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사로이 고백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포함하여 공적인 자리에서 고백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는 삼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라고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이 예배 어디쯤에 위치하는 것이 좋을까요? 개혁한 교회는 신앙고백을 예배 이곳 저곳에 다양하게 배치했습니다. 회개와 사죄선언 이후에 자리잡기도 하고, 설교 후에 자리잡기도 했습니다. 성찬식에 넣기도 하고, 예배가 마치는 강복선언 직전에 넣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신앙고백이 ‘예배순서의 집시’와 같다는 말도 있습니다. 정처 없이 이곳 저곳 떠돌아 다닌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을 하찮게 취급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어떤 순서들과도 연결을 지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고백을 전적인 헌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하여 최대한 뒤로 미룰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고백을 최대한 앞으로 당겨 예배를 여는 순서에 넣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컴퓨터나 핸드폰을 아무나 열고 사용하지 못하도록 패스워드를 걸어 놓지 않습니까? 맞는 패스워드를 쳐야 열립니다. 이것처럼 우리는 신앙고백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패스워드라고 생각합니다.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패스워드라고 생각한다면 최대한 앞당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늦게 고백하지 않아도 됩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삼대 보편신경이 있다
    고대교회는 삼대 보편신경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경이 그것들입니다.
    ‘사도신경’은 라틴어를 사용한 서방교회가 고백한 대표적인 신경입니다. 현재의 사도신경은 아마도 지금의 프랑스 지역에서 발생하여 로마교회로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공식적으로 채택했습니다. 사도들 숫자처럼 12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도들이 직접 작성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신경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에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이 명령에 근거해서 교회는 세례받는 이들에게 삼위의 각 위격을 믿는지를 묻고 답을 할 때마다 물에 잠그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먼저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제가 믿습니다’라고 답을 하면 그 사람을 머리까지 물에 잠급니다. 둘째로 묻는데 ‘당신은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음부에 내려 가셨으며, 사흘 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거기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제가 믿습니다’라고 답하면 한번 더 물에 잠급니다. 세번째로 묻습니다. ‘당신은 성령을 믿습니까?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사죄와 육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제가 믿습니다’라고 답하면 세번째로 물에 잠급니다. 이렇게 세례예식에 근거하여 작성된 사도신경은 이후에 신앙을 진술하는 방식으로 예배 때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니케아 신경’은 서방교회가 아닌 동방교회의 신경입니다. 이 신경은 주후 325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소집한 최초의 에큐메니컬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에서 작성한 신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작성한 신경입니다. 이 신경은 사도신경과 동일하게 삼위일체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삼위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를 더 분명하게 진술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성자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면서 사도신경에는 없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만세 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분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나셨으나 창조되지 않으셨고, 성부와 동일본질이시며, 그 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생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는 또한 성령님, 곧 주님이시고 생명의 수여자이신 분을 믿습니다. 그분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입니다.’ 이 신경에 삼위간의 관계가 분명하게 고백되어 있으니 이것을 제대로 고백하면 이단이 발붙일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한 교회들은 사도신경 뿐만 아니라 니케아 신경도 예배 때 고백했습니다. 동, 서방교회를 다 포괄할 수 있는 공교회적인 신경이 바로 이 니케아 신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앞으로 한 번씩 이 니케아 신경으로 고백하려고 합니다.
    마지막 신경인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던 정통의 대명사 아타나시우스의 이름을 딴 신경입니다. 세 신경 중 가장 긴 신경입니다. 이 신경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고백 뿐만 아니라 이후에 크게 논쟁이 된 기독론, 특히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면서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자세하게 고백되어 있습니다. 이 신경은 44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항목과 둘째 항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
1. 구원 받기를 바라는 자는 그 누구든지 다른 무엇보다도 공적(=보편적)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2. 누구라도 이 신앙 전부를 순결하게 보존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영원히 멸망 받을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을 충분히 고백하고 난 다음에 다음의 항목으로 마무리합니다. 謜. 이상이 공적 신앙입니다. 누구라도 신실하고 확고하게 믿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할 것입니다.” 아주 강렬합니다. 문제는 이 신경이 너무 길어서 예배 때 고백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이 고백만한 것이 없겠기에 교육의 시간에 활용하면 좋을 것입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순서로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깊어져 갑니다. 이 세 신경을 잘 이해하고 고백하면 우리 신앙이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십계명은 언약의 법전으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십계명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국 교인들은 예배 때 십계명을 낭독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구약시대로 돌아가려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있겠지만 실은 십계명을 낭독하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계명을 낭독하면 자신의 죄를 돌아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십계명인데 출애굽한 직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최초의 공예배가 드려진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두 번째 십계명은 신명기 5장에 있습니다. 이 십계명은 출애굽기의 십계명과 조금 다릅니다. 출애굽한지 40년이 지나 약속의 땅 입구에 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변화된 환경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대동소이하지만 두 십계명의 차이를 통해 우리는 문자만을 고집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후에 구약교회는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도 이 언약의 법을 계속해서 낭독했습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는 회당예배에서 율법을 낭독하는 것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제가 네덜란드에 있을 때 유대인들의 회당예배에 참석해본 적이 있는데 예배실 중앙에 율법 두루마리를 보관하는 큰 함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랍비가 그 두루마리를 꺼내서 회중석을 두루 다닌 후에 앞으로 나가서 그 두루마리를 읽습니다. 그냥 책 읽듯이 읽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듯이 운율을 넣어서 낭독합니다. 회중들도 따라서 낭독합니다. 간단한 해설이 있다고 하지만 그 율법을 낭독하는 것이 예배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근 2시간 가까이나 드리는 예배에서 말입니다. 신약교회는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이 필요 없습니까? 아닙니다. 구약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며, 특별히 십계명은 모든 시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법의 요약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 십계명을 낭독하는 것은 구약시대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을 낭독하는 것은 처음부터 말씀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존경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본문인 신명기 4장 13절에 보면 이 십계명이 단순한 윤리강령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 십계명은 하나님이 친히 두 돌판에 쓰신 것이며 언약의 법전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14절에서 말씀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가 거기로 건너가 받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증거판’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관계를 증거하는 돌판이라는 말입니다.
    미국에서 2000년에 ‘십계명 재판’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공공기관에 십계명을 부착하는 것은 미국 헌법의 정교분리정신에 어긋나니 십계명을 제거해 달라고 소송을 제기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미국에서 기독교 정신이 무너졌다는 탄식소리가 컸습니다. 어떤 기독교인 법관은 궁여지책으로 십계명은 기독교의 법전이 아니라 사회를 규율하기 위한 비종교적인 규범이니까 불법이 아니라는 법리해석을 내놓곤 했습니다. 구차한 발언이지요. 결과적으로는 2003년에 연방대법원에서는 공공기관에서 십계명을 떼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공공기관에서 십계명을 떼낸다고 교회가 분노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계명은 사회를 규율하기 위한 윤리강령이기 이전에 교회에 주신 언약의 법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만이 이 십계명을 바르게 알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설을 보면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회에서 십계명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에서 십계명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에서 더 이상 십계명을 들을 수 없는데 공공기관에 십계명을 붙여놓는다고 사회가 정화되겠습니까?
 
십계명은 감사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리 그래도 예배 때 십계명을 굳이 낭독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반론이 만만치 않습니다. 유럽의 어떤 교회들은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 두 개를 예배당 벽에 붙여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예배 때 굳이 십계명을 낭독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 누구나 바로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십계명이 마음에 새겨지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다른 대안은 없겠습니까? 예를 들면 예수님의 유명한 답변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서기관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이 답하셨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모든 구약율법을 요약한 것이니 이 말씀을 예배시간에 낭독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십계명 전체를 낭독한다고 해서 시간을 얼마나 잡아 먹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돌판에 새긴 언약의 법을 낭독하는 것에 우리가 왜 인색합니까? 
    십계명이 예배에서 어디쯤 자리를 잡는 것이 좋겠습니까? 우리는 이 십계명을 예배의 두 번째 파트인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십니다’파트를 이끄는 순서로 잡았습니다. 십계명은 우리의 죄악을 비춰보기 위한 거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생각에 가깝습니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주된 목적이 우리의 죄를 밝히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선포해서 죄가 드러나야 비로소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무엇보다 감사의 요소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배하는 하나님의 회중은 죄를 씻고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무리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신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십계명을 회개하기 위해 자극을 주는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감사하는 삶을 살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으로 대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았습니다. 십계명은 감사하는 삶의 주요한 부분이라는 말입니다.
    십계명을 오직 나의 죄를 찾아내는 계명으로 대하는 것은 십계명을 소극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 영광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과 사랑의 말씀으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율법을 적극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게 잘 이해되지 않으면 십계명의 서문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라’등과 같은 모든 조문을 언급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노예살이하던 집에서, 죄악으로 인해 마귀에 손아귀에 있던 자리에서 구출해 주신 후에 이 언약의 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지키면 구출해 주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속해 주시고 난 다음에 구속받은 자의 영광스러움이 계속해서 빛나도록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자유를 주셔놓고 자유를 남용할까 봐 한계를 두기 위해 십계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한 눈 팔지 못하도록 거리에 둔 신호등과 같은 것이 십계명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복된 지침으로서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한 언약의 법으로 대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십계명이 용서에 관한 부분이 아니라 다른 곳에 와야 합니다. 어디에 와야 하겠습니까? 설교가 끝난 후에 예배 마치기 직전에 십계명이 오면 되겠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가정으로, 세상으로 돌아가는 신자들이 이 세상 속에서 감사하며 살겠다는 고백으로 십계명을 낭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감사의 요소로 사용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던 칼빈조차도 십계명을 최대한 뒤로 미루지는 않고 회개와 사죄의 선언 부분에서 십계명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고 회개하기 이전에 배치한 것은 아니고 사죄선언 후에 십계명을 노래로 불렀습니다. 이것처럼 우리도 말씀을 충분히 받아서 육체의 정욕대로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게 된다면 십계명을 감사의 요소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날이 빨리 오면 좋겠습니다.

고백과 율법이 살아있는 예배와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겠다
    개혁한 교회는 고백(↑)과 율법(↓), 즉 사도신경과 십계명을 예배의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서론적으로 말씀 드렸듯이 개혁한 교회는 주일 오전과 오후예배에 십계명과 사도신경을 각각 나누어 배치했습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개혁자들은 율법과 고백을 통합된 관점에서 바라보았기에 오전 예배에서는 율법을 내세웠고, 오후예배에서는 고백을 내세웠습니다. 율법을 먼저 내세우고. 고백을 후에 내세운 것은 역사적인 순서를 따르려는 것만은 아닙니다. 순서는 바꾸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고백과 율법, 율법과 고백이 서로를 불러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므로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증을 가지고 삼위 하나님께 나아갈 뿐만 아니라 삼위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을 표시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통해 우리의 죄악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감사로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하는데 율법과 고백이 이 성찬식을 어떻게 비춰주고 있습니까? 성찬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율법인 십계명과 고백인 사도신경입니다. 성찬 예식문 중 십계명은 자기를 돌아보기 위해 사용되고, 사도신경은 떡과 잔을 받기 직전에 성찬에 참여할 신자의 고백과 헌신을 위해 사용됩니다. 매주일 예배마다 성찬식을 가진다면 십계명과 사도신경을 예배순서에 따로 넣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과 고백(↑)은 처음부터 예배의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런데 십계명과 사도신경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느냐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언약의 법전인 십계명은 예배 인도자가 낭독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선포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공교회적인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은 회중이 다같이 외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교회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십계명과 사도신경은 서로를 마주보면서, 서로를 향해 아름답게 화답합니다. 예배 인도자가 십계명을 낭독하는 시간은 따분한 시간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 선포되고 구별되는 영광스러운 시간입니다. 개인적인 고백을 넘어 하나님의 회중이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마귀와 세상이 벌벌 떱니다.
    고백과 헌신, 회개와 감사의 이 외침이야말로 천사들도 흠모하는 감격스러운 장면입니다. 고백과 율법이 있는 예배야말로 분파주의적인 예배가 아니라 전 교회역사와 통합되는 공교회적인 예배입니다. 우리는 과잉이라고 생각될망정 한 예배 안에 사도신경과 십계명을 같이 넣었습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우리의 고백과 헌신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신경과 율법, 고백과 언약법이 없으면 우리 예배는 한없이 초라하고 빈약해질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피상적이고 연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백과 율법이 살아 넘치는 예배와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을 알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막연한 신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야말로 패스워드와 같은 역할을 해서 삼위 하나님께 즉시로 나아갈 수 있게 되니 감사합니다. 예배에 고백과 더불어 율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이 된다면, 율법은 하나님께로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길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고백과 헌신, 회개와 감사를 통해 저희 교회가 공교회에 속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도와 주옵소서. 우리에게 고백과 율법을 주셔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누리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예배를 통해 삼위 하나님을 누렸으니 이 땅에서 삼위 하나님을 드러내게 도와 주옵소서. 오직 삼위 하나님께만 구원과 복이 있음을 온 땅이 알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 묵상하고 나누기
1. ‘예배 시작의 3가지’가 무엇입니까?

2. 사도신경이 발생하게 된 배경이 무엇입니까?

3. 초대교회의 삼대 보편신경들이 무엇입니까?

4. 신앙고백은 예배 어디에 자리를 잡는 것이 좋겠습니까?

5. 십계명의 두 버전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6. 십계명은 예배 어디에 자리잡는 것이 좋겠습니까?

7. 고백(사도신경)과 율법(십계명)이 신앙생활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묵상해 봅시다.  


어린이를 위한 질문
1. 예배 때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으면 이단이다, 맞습니까? 

2. 십계명은 신약시대에도 유효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맞습니까?

3. 고백과 (     )이 있는 예배야말로 (      )적인 예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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